맨체스터 마크 1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개발된 가장 초기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 중 하나이다. 맨체스터 베이비를 기반으로 하여 1948년 6월에 작동하였고, 1948년 8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1949년 4월에 첫 번째 버전이 가동되었다. 1949년 6월 16일부터 17일 사이에 Mersenne 소수를 검색하는 프로그램이 9시간 동안 오류 없이 실행되었다.
이 기계의 성공적인 운영은 영국 언론에서 널리 보도되었으며, "전자 두뇌"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설명은 맨체스터 대학교 신경외과학과의 장으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어 전자 컴퓨터가 진정으로 창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시작되었다.
마크 1은 대학교 내에서 컴퓨팅 자원을 제공하고 연구자들이 컴퓨터의 실용적 사용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곧바로 페란티의 상업적 버전 설계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개발은 1949년 말에 중단되었고, 1950년 말에 폐기되었으며, 1951년 2월에는 세계 최초의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범용 전자 컴퓨터인 페란티 마크 1로 대체되었다.
이 컴퓨터는 메모리 내 배열의 단어를 순차적으로 읽기 쉽게 해주는 인덱스 레지스터의 선구적인 도입으로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기계 개발로부터 34개의 특허가 나왔으며, 이 디자인의 많은 아이디어가 IBM 701 및 702와 같은 후속 상업 제품과 페란티 마크 1에 통합되었다. 주 설계자 프레데릭 C. 윌리엄스와 톰 킬번은 마크 1의 경험을 통해 컴퓨터가 순수 수학보다는 과학적 역할에서 더 많이 사용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51년 그들은 부동 소수점 유닛을 포함할 마크 1의 후속 모델인 메그 개발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기계는 맨체스터 자동 디지털 기계(MADM)라고도 불렸다.
1936년, 수학자 앨런 튜링은 프로그램과 작업 중인 데이터를 테이프에 저장하는 이론적 "범용 컴퓨터 기계"의 정의를 발표했다. 튜링은 이러한 기계가 알고리즘으로 작성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40년대 동안, 튜링과 콘라드 츠제 같은 이들이 컴퓨터의 메모리를 사용하여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테이프 대신 보관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으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 아키텍처를 정의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은 것은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이었다. 맨체스터 마크 1은 이러한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였다.

폰 노이만 컴퓨터의 실용적인 구축은 적절한 메모리 장치의 가용성에 달려 있었다. 세계 최초의 전자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인 맨체스터 대학교의 베이비는 1948년 6월 21일 첫 프로그램을 실행하며 저장 프로그램 접근 방식과 윌리엄스 튜브라는 초기 형태의 컴퓨터 메모리의 실용성을 성공적으로 입증하였다. 초기 전자 컴퓨터는 일반적으로 재배선되거나 플러그와 패치 패널을 통해 프로그래밍되었으며, 현대 컴퓨터처럼 메모리에 별도로 저장된 프로그램이 없었다. 예를 들어, ENIAC을 재프로그래밍하는 데는 며칠이 걸릴 수 있었다.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는 또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으며, 특히 영국 국가 물리 연구소의 파일럿 ACE, 캠브리지 대학교의 EDSAC, 그리고 미국 육군의 EDVAC이 있었다. 베이비와 마크 1은 주로 메모리 장치로서 윌리엄스 튜브를 사용한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1948년 8월부터, 베이비는 맨체스터 마크 1의 프로토타입으로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고, 초기에는 대학교에 보다 현실적인 컴퓨팅 시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48년 10월, 영국 정부의 수석 과학자 벤 록스페이저는 맨체스터 대학교를 방문하여 프로토타입 마크 1의 시연을 받았다. 록스페이저는 그가 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아 즉시 지역 회사인 페란티와 정부 계약을 체결하여 이 기계의 상업적 버전인 페란티 마크 1을 제작하기로 했다. 1948년 10월 26일자 편지에서 록스페이저는 페란티가 "우리가 논의한 대로, F. C. 윌리엄스 교수의 지침에 따라 전자 계산 기계를 제작하도록 진행하라"고 허가하였다. 그 이후 마크 1의 개발은 페란티에 상업 기계의 기초가 될 디자인을 제공하는 추가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정부와 페란티의 계약은 1948년 11월부터 5년간 진행되었고, 연간 약 35,000파운드(2023년 기준으로 약 138만 파운드에 해당)로 추정되었다.
베이비는 프레데릭 C. 윌리엄스, 톰 킬번, 제프 투틸 팀에 의해 설계되었다. 마크 1 개발을 위해 D. B. G. 에드워즈와 G. E. 토마스라는 두 명의 연구 학생이 합류하였으며, 본격적인 작업은 1948년 8월에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페란티에 상업 기계인 페란티 마크 1의 기초가 될 작동 디자인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연구자들이 그러한 기계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을 얻도록 하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맨체스터 마크 1의 첫 번째 버전인 중간 버전(Intermediary Version)은 1949년 4월에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버전은 메인 스토어와 새롭게 개발된 자기 백업 스토어 간의 데이터를 프로그래밍적으로 전송하는 데 필요한 명령어가 부족하여, 기계를 정지시키고 수동으로 전송을 시작해야 했다. 이러한 누락된 기능은 최종 사양 버전에 통합되어 1949년 10월에 완전히 작동하였다. 이 기계는 4,050개의 진공관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력 소비량은 25킬로와트였다.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베이비에서 사용된 표준 장치 대신 GEC에서 제작한 목적 맞춤형 CRT가 사용되었다.
베이비의 32비트 워드 길이는 40비트로 증가하였고, 각 워드는 하나의 40비트 숫자 또는 두 개의 20비트 프로그램 명령어를 저장할 수 있었다. 메인 스토어는 초기에는 두 개의 더블 밀도 윌리엄스 튜브로 구성되었으며, 각 튜브는 32×40비트 워드 배열인 페이지를 두 개 보유하고 있었고, 추가로 32페이지를 저장할 수 있는 자기 드럼이 백업되었다. 최종 사양 버전에서는 네 개의 윌리엄스 튜브에 8페이지의 메인 스토어와 128페이지의 자기 드럼 백업 스토어로 용량이 증가하였다. 초기에는 자기 휠(magnetic wheel)이라고 알려진 12인치(300mm) 지름의 드럼이 표면에 평행한 자기 트랙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각 트랙은 고유의 읽기/쓰기 헤드를 가지고 있었다. 각 트랙은 2,560비트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두 페이지에 해당했다. 드럼의 한 회전은 30밀리초가 걸리며, 이 동안 두 페이지 모두 CRT 메인 메모리로 전송될 수 있었으나, 실제 데이터 전송 시간은 읽기/쓰기 헤드 아래에 페이지가 도착하는 지연 시간에 따라 달라졌다. 드럼에 페이지를 쓰는 데는 읽는 것보다 약 두 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럼의 회전 속도는 중앙 처리기 클록과 동기화되어 추가 드럼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데이터는 현재까지도 알려진 페이즈 변조 기법인 맨체스터 코딩을 사용하여 드럼에 기록되었다.
기계의 명령어 세트는 베이비의 7개에서 처음에 26개로 증가하였고, 하드웨어로 수행되는 곱셈이 포함되었다. 최종 사양 버전에서는 30개 명령어로 증가하였다. 각 워드의 10비트는 명령어 코드를 보유하는 데 할당되었고, 표준 명령어 시간은 1.8밀리초였으나, 곱셈은 피연산자의 크기에 따라 훨씬 느렸다.
기계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현대 컴퓨터에서 일반적인 인덱스 레지스터의 통합으로 여겨진다. 베이비는 윌리엄스 튜브로 구현된 두 개의 레지스터인 누산기(A)와 프로그램 카운터(C)를 포함하고 있었다. A와 C가 이미 할당되었기 때문에 두 개의 인덱스 레지스터를 보유하는 튜브는 원래 B라인(B-lines)으로 불리며 B라는 이름이 붙었다. 레지스터의 내용은 프로그램 명령어를 수정하는 데 사용되어 메모리에 저장된 숫자 배열을 편리하게 반복(iteration)할 수 있게 하였다. 마크 1은 곱셈 연산을 위한 곱셈수(M)와 곱셈기를 보유하는 네 번째 튜브도 가지고 있었다.
마크 1의 각 프로그램 명령어에 할당된 20비트 중 10비트는 명령어 코드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어 1,024(2^10)개의 서로 다른 명령어를 지원하였다. 초기에는 26개의 명령어가 있었으나, 자기 드럼과 CRT 메인 스토어 간의 데이터 전송을 프로그래밍적으로 제어하는 기능 코드가 추가되면서 30개로 증가하였다. 중간 버전에서는 프로그램이 키 스위치를 통해 입력되었고, 출력은 베이비와 마찬가지로 CRT를 통해 점과 대시의 형태로 표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10월에 완성된 최종 사양 기계는 5홀 종이 테이프 리더와 펀치를 갖춘 텔레프린터의 추가 혜택을 누렸다.
수학자 앨런 튜링은 1948년 9월 맨체스터 대학교 컴퓨팅 기계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표준 ITA2 5비트 텔레프린터 코드를 기반으로 한 32진 인코딩 방식을 고안하였다. 이를 통해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종이 테이프에 기록하고 읽을 수 있었다. ITA2 시스템은 5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32개의 이진 값 각각을 단일 문자에 매핑하였다. 예를 들어, "10010"은 "D", "10001"은 "Z"를 나타낸다. 튜링은 몇 가지 표준 인코딩만 변경하였는데, 예를 들어 "no effect"와 "linefeed"를 나타내는 00000과 01000은 각각 "/"와 "@"로 표현되었다. 프로그램과 데이터에서 가장 흔한 문자인 이진 제로는 슬래시로 표시되었으며, 이는 "///////////////"와 같은 시퀀스를 생성하였다. 초기 사용자 중 한 명은 튜링이 슬래시를 선택한 것이 맨체스터의 "악명 높은 우울한" 날씨를 반영한 무의식적인 선택이라고 제안하였다.
마크 1은 40비트 워드 길이를 가지고 있어 각 워드를 인코딩하는 데 여덟 개의 5비트 텔레프린터 문자가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 이진 워드는:
10001 10010 10100 01001 10001 11001 01010 10110
종이 테이프에서는 ZDSLZWRF로 표현되었다. 스토어의 어떤 워드든 텔레프린터의 키보드를 통해 설정할 수 있었고, 출력은 프린터로 전송되었다. 기계는 내부적으로 이진 방식으로 작동하였지만, 입력과 출력에 필요한 십진수와 이진수 간 변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마크 1에는 어셈블리 언어가 정의되어 있지 않았고, 프로그램은 각 40비트 워드에 대해 여덟 개의 5비트 문자로 인코딩된 이진 형태로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다. 프로그래머들은 수정된 ITA2 인코딩 체계를 암기하여 작업을 쉽게 하도록 권장되었다. 데이터는 프로그램 제어 하에 종이 테이프 펀치로부터 읽고 썼다. 마크 1에는 하드웨어 인터럽트 시스템이 없었으며, 읽기 또는 쓰기 작업이 시작된 후 다른 입출력 명령이 발견될 때까지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되었고, 그 시점에서 기계는 첫 번째 작업이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마크 1에는 운영 체제가 없었고, 유일한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입출력을 위한 몇 가지 기본 루틴뿐이었다. 개발된 베이비와 마찬가지로, 이 기계의 저장 공간은 가장 중요한 자리의 숫자가 왼쪽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1은 5비트로 "10000"으로 표현되었다. 음수는 현재 대부분의 컴퓨터와 같이 2의 보수를 사용하여 표현되었으며, 이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비트의 값은 숫자의 부호를 나타낸다. 양수는 해당 위치에 0을 가지고, 음수는 1을 가진다. 따라서 각 40비트 워드에서 표현할 수 있는 숫자의 범위는 −2^39에서 +2^39 − 1(십진수: -549,755,813,888에서 +549,755,813,887)까지였다.
마크 1에서 처음으로 실행된 현실적인 프로그램은 1949년 4월 초에 Mersenne 소수를 찾는 알고리즘이었으며, 이는 1949년 6월 16일부터 17일 밤 동안 오류 없이 9시간 동안 실행되었다. 이 알고리즘은 맨체스터 대학교 수학과의 책임자인 맥스 뉴먼이 지정하였고, 프로그램은 킬번과 투틸이 작성하였다. 이후 앨런 튜링은 최적화된 버전의 프로그램인 'Mersenne Express'를 작성하였다.
맨체스터 마크 1은 1950년까지 리만 가설 조사 및 광학 계산을 포함한 유용한 수학 작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투틸은 1949년 8월 페란티로 일시 전근되어 페란티 마크 1의 설계를 계속하며 4개월 동안 그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맨체스터 마크 1은 1950년 8월에 해체되고 스크랩되었으며, 몇 달 후 세계 최초의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범용 컴퓨터인 페란티 마크 1로 대체되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마크 1 및 그 이전 기계인 베이비의 설계 팀 평균 규모는 약 4명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팀의 작업을 바탕으로 34개의 특허가 출원되었다. 1949년 7월, IBM은 윌리엄스를 초청해 마크 1의 설계에 대해 논의하는 모든 비용이 포함된 여행을 제공하였다. 이후 이 회사는 윌리엄스 튜브를 포함한 여러 특허 아이디어를 라이센스하였다. 맨체스터 마크 1의 가장 중요한 설계 유산은 아마도 인덱스 레지스터의 통합일 것이며, 이 특허는 윌리엄스, 킬번, 투틸, 뉴먼의 이름으로 출원되었다.
킬번과 윌리엄스는 컴퓨터가 순수 수학보다 과학적 역할에서 더 많이 사용될 것이라고 결론짓고, 부동 소수점 장치를 포함하는 새로운 기계 개발을 결정하였다. 1951년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4년 5월 첫 프로그램을 실행한 결과물인 'Meg', 즉 메가사이클 기계가 탄생하였다. 이 기계는 마크 1보다 작고 단순했으며 수학 문제를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페란티는 윌리엄스 튜브 대신 더 신뢰할 수 있는 코어 메모리를 사용한 Meg 버전을 생산하여 '페란티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다.
맨체스터 마크 1과 그 이전 기계인 베이비의 성공적인 운영은 영국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으며, 기계들을 "전자 뇌"라고 표현하였다.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1946년 10월 31일 영국 라디오 공학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 용어를 처음 소개하며 당시 존재했던 원시적인 컴퓨터들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를 추측하였다. 1949년 첫 현대 컴퓨터에 대한 보도에서 촉발된 흥분은 개발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켰다. 맨체스터 대학교 신경외과 교수인 제프리 제퍼슨 경은 1949년 6월 9일 리스터 연설을 하면서 "기계 인간의 정신"이라는 주제를 선택하였다. 그의 목적은 맨체스터 프로젝트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계가 감정과 생각에 의해 소네트를 쓰거나 협주곡을 작곡할 수 있을 때, 즉 우연히 기호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쓴 것을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기계가 뇌와 같다고 동의할 수 있다. 어떤 기계도 성공에 대해 기뻐하거나, 진공관이 고장났을 때 슬퍼하거나, 아첨에 따뜻해지거나, 실수로 인해 비참해지거나, 성에 매료되거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화를 내거나 슬퍼할 수 없다."
《타임스》는 제퍼슨의 연설을 다음 날 보도하며, 그가 "로열 소사이어티의 우아한 방이 이러한 새로운 동료들을 수용하기 위해 차고로 전환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뉴먼을 의도적으로 모욕한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뉴먼은 이 사회에서 맨체스터 팀의 작업을 계속하기 위한 보조금을 확보한 바 있다. 이에 뉴먼은 《타임스》에 후속 기사를 작성하며 마크 1의 구조와 인간 두뇌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기사에는 튜링과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튜링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것은 앞으로 올 것의 미리보기일 뿐이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그림자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기계의 능력을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기계와의 경험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능성에 적응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나는 왜 그것이 인간 지성이 다루는 모든 분야에 진입하고 결국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없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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